*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배경으로 나오는 이포에는 안개가 깔려있다. 안개가 깔린 풍경처럼 해준에게 세상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소신 있고 프로페셔널한 해준은 용의자인 서래에 대한 호감 때문에 눈앞에 있는 사실들을 보지 못하고 직업적으로 어리숙해진다. 이포에서는 반대로 서래에 대한 비호감으로 사실적 판단이 어려워진다. 개인적 감정으로 서래를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거나 용의자로 몰아간다.
서래는 불법 밀입국자라는 혐의를 받자 자신의 외조부 계봉석 씨가 의용군이라는 뜬근없는 말을 한다. 확인 결과 증거사진까지 있다. 후에 밝혀지지만 서래의 이 모든 말과 증거는 죽은 남편이 비리투성이인 밀입국 심사관이라는 점에서 모두 조작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조작이 아닐 가능성도 다시 한번 나오는데 서래의 어머니가 한국에 서래의 산山이 있다고 한 것과 그녀가 재판까지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쪽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불확실성, 미리 판단하는 것의 어그러짐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죽은 남편의 비리를 알기 전 서래의 당당한 말투와 그 말들로 그려지는 외조부 계봉석 씨의 일화는 매우 그럴듯해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말과 눈앞에 만져지는 증거조차도 쉽게 조작될 수 있는 세상이다.
해준은 개인적 감정으로 현실을 왜곡해서 보고 서래는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세상을 속인다. 서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가 자신의 평안을 위해 딸에게 안락사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서래가 믿을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 자신에게 스스로의 평안을 위해 부정한 일을 시키고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나버렸다. 또한 한국에서 단일하게 의지할 수 있던 남편은 서래를 학대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없어진다. 이것으로 서래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런데 해준은 자신의 소신을 버리고 프로페셔널한 형사라는 정체성까지 버리면서 서래를 도와준다. '붕괴 됐어요.'라는 말은 타인을 위해 자신이 희생되었음을 의미한다. 서래가 바라보는 세상의 이치와는 맞지 않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버린 것이다. 서래가 반복해서 보는 TV 속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서래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느낀다. 영화 후반에 서래는 해준에게 '저보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라고 한다. 해준은 '내가 언제요'라고 하고 이 '붕괴됐어요'라는 말을 듣는 서래의 모습이 나온다.
해준의 다른 사건의 다른 용의자가 자살을 하자 해준의 아내는 전화로 남편이 걱정된다는 말을 정성스럽게 한다. 이 말도 진실일 수 있고 본심일 수 있지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후에 나온 해준 아내의 외도를 보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진심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 해준의 아내는 새로운 남자를 당당히 소개해 주고 통계적인 사실들을 들먹이면서 솔직하게 얘기하는 타입이다. 몰래 외도했던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속에서 해준과 잘해보려 했을 수 있다. 모든 건 추측이다. 확실한 것은 없다.
뭐가 진실인지 모르는 알 수 없는 것 가득한 세상에서 통계는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해준의 아내가 모든 일에 통계를 갖다 대는 것이 시답잖아 보이며 와닿지 않고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인다는 점에서 그 나침반조차 확신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래는 해준의 일을 알자마자 달려온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행동은 말보다는 그나마 진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행동들도 후에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진실해 보이지 않게 된다. 말도 행동도 통계도 증거도 진실과 본심을 알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은 마음 둘 데 없는 그냥 의문투성이 뿌연 안개처럼 보인다.
해준은 원전에서 일하는 아내의 복잡한 업무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서래의 서툰 한국말도, 증거도, 행동도 이젠 모두 알 수 없음 상태가 돼버렸다.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 죽자 해준은 오해가 쌓여 서래에 대한 호감이 비호감으로 바뀌었고, 이 '알 수 없음' 상태를 자신이 생각하는 쪽으로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후반부에 계속해서 드러난 증거와 진실들, 결정적으로 서래의 희생을 알게 된 해준은 서래가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도 서래를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 서래가 해준의 희생을 보며 사랑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뿌연 안개가 가라앉은 이포처럼 세상에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통계도 말도 행동도 증거도 확신을 가지지 어려운 세상.. 영화에서 단 하나의 명확한 진실은 해준과 서래가 서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선 각자 희생이 필요했다.
해준은 세상을 마을에 내려앉은 안개처럼 '알 수 없음' 상태로 두고 혼란에 빠졌지만 서래는 '그때 그 순간' 해준의 말과 마음 만을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진실로 알고 확실하게 느꼈다.
"붕괴됐어요."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마음은 희생을 통해 비언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해준은 만조라고 외친다. 물이 가득 찬다는 한국말이고 만조는 한자로 된 말이다. 해준과 서래처럼 중국과 한국이 뒤섞인 말이다. 만조란 단어가 생소한 한국 사람은 뜻을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그 단어가 무엇이든 간에 해준이 지금 다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래를 향한 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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